시골에서 창작하기
스튜디오126 큐레토리얼 워크숍 <동시대 미술에서의 키워드, 전시 사례 연구>
저는 2019년부터 제주 서쪽 시골 마을에 있는 미술관옆집(제주시 한경면 저지리)이라는 창작 공간이자 아티스트 레지던시를 운영하는 시각 예술가입니다. 안거리(본채), 밖거리(별채), 귤 창고와 우영팟(텃밭)이 있는 미술관옆집에서 살며 도시에서는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감각과 리듬을 발견했습니다. 또한, 시골을 터전 삼아 활동하는 다양한 동료 예술가를 만나며, 저의 삶이 큰 시대적 흐름 속에 있음을 지각했습니다. 그렇기에 제주 이주 7년 차인 2024년, ‘시골에서 창작하기’를 주제로 미술비평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한라산을 중심으로 동, 서, 남, 북으로 나눠진 제주 창작자의 삶과 활동을 잇고 유사한 해외 사례를 연구해 국제적 맥락을 짓는 현대 미술 비평문을 탈고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시골 창작’의 해외 사례로는 현재까지 북아일랜드의 데리(Derry), 아일랜드의 웩스포드(Wexford), 그리고 루마니아의 부쿠레슈티(Bucharest) 근교를 다녀왔습니다. 앞으로 태국 메콩강 지역과 일본 키난 지역을 방문할 예정입니다.

이번 워크숍에서 발표할 사례는 아일랜드 남동부에 위치한 항구도시 웩스포드의 블랙버드 컬처-랩(Blackbird Cultur-Lab)입니다. 블랙버드 컬처-랩은 멕시코 출신 큐레이터 카를라 산체스(Karla Sánchez)와 웩스포드 출신 시각 예술가 오신 오코넬(Oisín O’Connel)이 3명의 자녀, 반려동물과 함께 생활하며 다양한 창작 활동을 기획/운영하는 살림집이자 예술공간입니다. 광활한 농지 위에 세워진 독특한 건축물을 중심으로 2022년부터 아티스트/연구자 레지던시, 어린이 워크숍, 상영회, 공연, 만찬 등 퍼블릭 프로그램을 주최했습니다.
카를라와 오신은 블랙버드 컬처-랩을 ‘창작과 경작이 만나는 곳(Where arts and farming life meet)’이라고 소개합니다. 다시 말해, 블랙버드 컬처-랩의 핵심은 인간과 땅의 관계입니다. 오신의 가족은 대대로 농부였으며, 블랙버스 컬처-랩 또한 가족으로부터 물려받은 농지에 지어졌습니다. 농업에 종사한 적이 없는 카를라-오신 부부는 재생 농업(regenerative farming)을 배워 집을 둘러싸고 있는 농지를 경작하기 시작했습니다. 재생 농업은 지속 가능한 식량 생산을 위해 농부들이 시작한 환경 운동으로, 건강한 토양과 생물 다양성을 중시합니다.
생물 다양성의 관점에서 인간과 자연의 경계는 사라집니다. 각양각색의 생명체가 공존하는 땅은 곧 인간에게도 이롭기 때문입니다. 농부들은 재생 농업이 장소-특정적(site-specific)이라고 말합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자금, 노동력, 땅의 건강 상태, 기후 등)에 따라 땅을 살리는 방법을 찾아나가는 과정이 바로 재생 농업이기 때문입니다. 카를라는 재생 농업의 연장선상에서 ‘재생 예술(regenerative art)’을 말합니다. 땅의 회생력, 창작의 회생력을 상상하며, 에나 칭의 저서 『세계 끝의 버섯: 자본주의의 폐허에서 삶의 가능성에 대하여』의 한 문구가 떠올랐습니다:
“[...] 불확정성에는 아주 흥미로운 자연-문화의 매듭이 있다. [...] 서로 다른 속성의 냄새가 함께 쌓여 있다. [...] 서로 뒤엉킨 것을 완벽히 해체하려고 하면 [...] 가장 중요한 것을 잃어버릴 수 있다.”
다음은 블랙버드 컬처-랩의 키워드입니다:
자연과의 협업 Work with nature
제철 활동 Follow the seasons
최소한의 인풋 Reduce inputs
우수한 작물 Grow quality produce
주어진 것에 감사 Make the most of what we have
건강한 땅의 보존 Preserve healthy land
이 중 제가 요즘 가장 많이 곱씹는 키워드가 바로 ‘제철 활동’입니다. 도시에서는 1년 내내 일을 합니다. 하지만 시골에서는 해와 달의 움직임(계절과 날씨)에 따라 노동과 휴식 시간이 정해집니다. 예술가에게 그런 방식의 창작 활동이 가능할까요? 사시사철 작업실에서 작품을 만들거나 1년 내내 전시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창작의 '때'를 기다려야 한다거나, 타인이 작품에 개입할 수 있다거나(지렁이나 미생물이 땅을 돌보 듯), 전시를 하기까지 숙성 시간을 가진다면 어떨까요? 효율과 생산성을 중시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능한 상상일까요?
제가 방문했을 당시 블랙버드 컬처-랩을 둘러싼 농지는 잡초로 무성했습니다. 이는 카를라와 오신이 2년에 걸쳐 12종의 토종 풀 씨앗을 뿌려 만든 다종 목초지(multi-species sward)였습니다. 저는 운이 좋게도 그런 귀한 목초지에 처음으로 소가 풀리는 현장을 목도할 수 있었습니다. 소 한 무리가 엄청난 속도로 풀을 해치우는 모습이 마냥 신기했습니다. 카를라는 드넓은 초지에서 만찬을 즐기는 소들을 바라보며 아마 2주면 다 해치워버릴 거라며 웃었습니다. 그러면서 저에게 야생의 소를 한번 상상해 보라고 제안했습니다. 그들은 엄청난 거리를 이동하며 풀을 먹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땅을 밟아주었을 뿐 아니라, 똥, 오줌, 침, 털 등 유기물을 땅에 ‘선물’했습니다. 그것이 선물인 이유는 소 무리가 지나간 곳에는 반듯이 싱그러운 풀이 올라오기 때문입니다. 재생, 그것이 바로 자연의 이치입니다. 불행하게도 오늘의 소는 이동의 자유가 없습니다. 대지 또한 네모난 형태로 조각나 사유화되었습니다. 카를라와 오신은 과거로 돌아갈 수 없는 현실을 직시하며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고 실천에 옮기고 있었습니다. 도나 해러웨이는 『트러블과 함께하기: 자식이 아니라 친척을 만들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의 과제는 창의적인 연결망 안에서 친척을 만드는 것이다. 그것은 두터운 현재 안에서 함께 잘 살고 잘 죽는 것을 배우는 실천이다.”
블랙버드 컬처-랩은 창작과 경작의 장소일 뿐 아니라 세 명의 아이가 함께 거주하는 살림집입니다. 제가 방문하기 얼마 전 아이들은 참다못해 파업을 선언했고, 카를라와 오신은 아이들과의 협상 테이블에 마주 앉을 수밖에 없었다고 고백합니다. 그 결과 1년 중 일정 기간(2~3달)은 손님도, 공공 행사도, 소셜미디어도 없이 지내기로 합의했습니다. 협상이 잘 체결되었기에 아이들은 저를 반갑게 맞아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모든 것은 때가 있음을 이 시골 아이들이 어른들에게 일깨워 주었습니다.
카를라의 소개로 지역에 살고 있는 벨기에 작가 엘스 디에트보스트(Els Dietvorst)를 만났습니다. 우리는 엘스의 대지미술 프로젝트를 보러 블랙홀 해변(Blackhall Beach)을 방문했습니다. 엘스는 팬데믹 기간 매일 반려견과 함께 블랙홀 해변을 산책했습니다. 하루는 해변 한 가운데 우뚝 솟아 있는 커다란 검은 바위에 누군가 흰 조약돌 하나를 얹어놓고 그 옆에 “i'm so lonely(너무 외롭다)”라고 써 놓은 것을 발견했습니다. 비대면이 뉴노멀이었던 시기, 한결같이 해변을 지키는 이 바위를 매개로 외로운 이들이 서로 소통하고 위로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후 엘스는 해변을 산책할 때마다 흰 조약돌을 한 움큼 모아 바위를 장식했습니다. 어느덧, 다른 사람들도 이 행위에 동참하고 있었습니다. 엘스는 불특정 다수의 참여로 변신을 거듭하는 바위의 모습을 같은 각도에서 2년간 촬영했습니다. 그리고 바위 사진과 함께 당시 썼던 일기를 엮은 『해변의 신당』(2022)이라는 소책자를 펴냈습니다. 다음은 책에 포함된 엘스의 글 중 하나입니다:
그는 첫 번째 참여자였다. 맨발로 해변을 달려오더니 내 앞에 멈춰 숨을 헐떡이며, “도와드릴까요?”라고 물었다. 이 해변은 그의 해변이었다. 이 신당도 그의 신당이 되었다. 1년 후. 그는 바위 위로 올라가 꼭대기에 탑을 쌓았다. 그가 말했다. “바위가 계속 변화하고 자라나는 것을 보는 게 즐거워요. 한때는 그저 평범한 바위였는데, 어느 날 아름다운 돌들로 장식되었죠. 모두의 참여로 인해서요. 우리에게 공동의 목표가 있다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것 같아요.”
He was the first one. He came barefoot running down the beach, stopped, out of breath, and said: “Can I help?” The beach is his beach. The shrine became his shrine. A year later he climbs up and makes a tower on top of the rock. He says: “It is nice to watch it change and grow. One day it was just a regular rock and then it has all these beautiful stones on it and everyone is contributing. It is kind of a nice feeling of what we can do if we have a common goal.”
블랙버드 컬처-랩, 카를라, 오신, 목초지, 소 무리, 아이들, 엘스, 바위 신당은 ‘시골에서 창작하기’가 지닌 고유한 연결성을 보여줍니다. 시골에서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습니다. 기후 위기와 같은 거대한 변화 속에서 시골의 연결성이야말로 동시대적 부름이 아닐까요? 아일랜드 웩스포드의 사례는 ‘개인플레이’가 만연한 미술계에 시대적 질문을 던질 뿐 아니라 새로운 변화를 불러일으킬 만한 거울임은 틀림없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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